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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일깨우는 말씀 [성경이야기]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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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라마테임조핌이라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의 언덕에 자리잡은 마을이었지요. 그곳에 엘카나라는 남자가 살았는데 그에겐 아내가 두 명 있었습니다. 그 중 페닌나라는 아내는 아들 딸을 많이 낳았지만 한나라는 아내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매우 슬펐습니다. 남편이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전히 매우 슬펐습니다.

해마다 남편은 그들이 소위 말하는 신을 숭배하고자 온 가족을 데리고 시로라는 곳에 갔습니다. 예배가 끝나면 그들은 연회를 열었고 모두가 그 사원에 모였지요. 그럴 때면 많은 자식을 둔 아내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였지만 한나는 늘 혼자였어요.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다른 부인을 볼 때 한나는 여느 때보다 더욱 슬퍼졌습니다. 연회가 끝나고 그녀는 연회장을 빠져나와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비통하고 슬픈 마음을 신께 말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지요. “저에게 아이를 하나 주신다면 아이가 평생 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기도를 듣는 신은 그녀의 기도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사제 엘리는 그 부인을 보고 술취한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인은 사제에게 얘기했지요. “저를 악한 여자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저는 취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너무나 불행하고 슬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엘리에게 자신의 상황을 털어놓았지요. 그러자 엘리가 대답했어요. “평안해지려면 신께 기도하세요. 부인이 갈망하는 자식을 달라고 신께 기도해 보세요.” 사제의 말을 들은 후 한나는 눈물을 그쳤습니다. 집에 돌아온 후 그녀는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신은 정말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해서 아주 아름다운 아이를 하나 선사했습니다. 그녀는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지요. 한나는 말했습니다. “이 어린애가 조금 더 자라면 시로로 데려가서 출가인이 되도록 해야지. 이 아이는 평생 그곳에 머물면서 신에게 봉사할 거야.” 그녀는 정말로 그 약속을 지키고자 그 아이를 사제 엘리에게 데리고 가서는 이렇게 말했지요. “이 아이가 바로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신이 내려주신 아이입니다. 저는 이 아이를 신에게 되돌려 드리고자 당신에게 보냅니다. 부디 잘 돌봐 주시고 가르쳐서 신을 위해 일하도록 해주십시오.” 며칠 후에 그 가족은 라마테임조핌으로 돌아가고 사무엘만이 사제 엘리와 함께 남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식과 이별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기 마련이며 그것은 한나에게도 아주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사실을 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신은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지요. 시간이 흐른 후 신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더 주어서, 그녀가 모성애로 자식들을 돌볼 수 있게 해주었지요. 해마다 그들이 시로에 갈 때면 한나는 어린 사무엘을 찾아가서 손수 만든 옷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제 사무엘은 아주 사랑스런 어린이로 자랐습니다. 모두가 그를 사랑했지요. 이젠 사제 엘리가 늙었기 때문에 그 신전을 돌볼 수 있도록 자식들을 속히 준비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자식들은 아버지 같지 않았지요. 자식들 모두 탐욕스러웠고 신을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자식들에게는 성직자의 자리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신이 엘리에게 경고했습니다. 신이 말했습니다. “내가 성직자를 선택할 것이니, 그는 나에게 충성스러워야 하고 내 말을 듣고 내가 바라는 것을 모두 할 사람이어야 하느니라.”

어느날 밤 사무엘은 신전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약간 깨어난 상태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요. 급히 엘리에게 달려가 보았지만 그 늙은 사제가 부른 게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일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에게 물었지요. “부르셨습니까? 저 왔습니다.” 하지만 역시 엘리가 부른 게 아니었지요.

늙은 사제는 신이 사무엘을 부른 게 틀림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그 소리가 다시 들리면 어떻게 말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세번째로 소리가 들려오자 사무엘이 신에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의 하인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소서.” 신이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엘리의 자식들을 벌하고자 하노라. 그 자식들 중 누구도 나의 성직자가 될 수 없도다!”

다음날 아침, 신이 사무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엘리가 물었지만 사무엘은 전날 밤 신에게 들은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늙은 사제는 말해 달라고 사무엘에게 명령했습니다. 사무엘은 주저하면서 말해 줄 수밖에 없었지요. 그 이야기를 들은 엘리는 몹시 슬퍼졌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했지요. “신의 생각에 옳은 일이라면 그대로 둘 수밖에.”

얼마 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민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특별한 상자 하나를 시로로 보냈습니다. 그 작은 상자엔 신의 힘이 담겨 있어서, 전쟁터에서 그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지요. 엘리의 두 자식들이 그것을 진지로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그 상자는 도움이 안 되는 듯했지요. 팔레스타인이 전쟁에서 이겼을 뿐만 아니라 그 성스러운 상자도 빼앗겼으며 엘리의 자식들도 전사했습니다. 이제 엘리는 너무 늙어서 양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였습니다. 그 참혹한 패전 소식을 듣고는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명예롭게 그들의 도시로 돌아와서는 승리의 상징으로서 그 성스러운 상자를 용의 성전에 두었습니다. (용은 팔레스타인의 우상신이었음) 다음날 그들의 우상인 용의 동상이 성스러운 상자 앞에서 넘어져 코가 부서졌습니다. 사람들은 동상을 다시 원위치 시켰습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 다시 넘어졌지요. 이번에는 완전히 박살이 났습니다. 그리고는 온 도시에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지요. 모두들 몹시 겁에 질려서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어서 저 성스러운 상자를 버리자!”

그들은 가드라는 곳으로 상자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역병은 계속 퍼져 나갔어요. 이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매우 걱정하고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마법사와 성직자를 불러놓고 토론을 했습니다. “이 상자를 어서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신에게 바칠 선물도 함께 보내야 합니다.” 이제 그들은 이스라엘의 신을 두려워했으며 무한한 힘을 가진 진정한 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일부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충고했지요. “그렇게 해야만 우리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신이 이집트인들에게 한 일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두 마리의 소가 끄는 마차에 그 상자를 넣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기다려 보기로 했지요.

소 두 마리는 아주 고분고분했습니다. 마치 훈련을 받은 것처럼 상자를 싣고 국경을 가로질러 곧장 이스라엘의 베드 셰메스라는 곳으로 갔습니다. 마차가 도착하자 마을 사람들은 성스러운 상자의 귀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 뭔지 아세요? 자식을 간절히 바란 여인입니다. 그녀는 아이가 없어서 매우 외롭고 고통스러웠으며 남에게 시달림을 당했지요. 그래서 신에게 달려가 울었어요. 그토록 간절히 갈구한 끝에 얻은 어린 자식을 신에게 바친 겁니다! 자신의 아이를 신에게 바치는 사람을 볼 때면 매우 감동 받습니다. 마음이 가장 순수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지요. 만일 우리였다면 아마도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서 아이를 보내지 못했을 겁니다. 그토록 갈망했던 아이를 얻은 후 신에게 바친 거예요. 하지만 하나를 바쳐서 다섯 명을 얻은 거지요.

그렇기 때문에 욕심을 부리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얻었을 때 그것을 당연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도 절대 그것을 당연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결코 신을 잊지 마세요. 그러면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무언가를 구하고자 한다면 모든 것이 신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베풀 때 그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필요하다면 사용하세요.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면 나눌 수도 있겠지요.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 최고입니다. 신에게 많이 바칠수록 더 많은 것을 가질 것입니다.

그 여인은 자식에 대해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습니다. “신에게 바치긴 하지만 실제로 드릴 필요까진 없잖아요. 마음속으로 바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 역시 늘 이런 식이 아닙니까? “이런 의도만 가져도 충분히 좋지! 신은 나의 신실함을 아셔. 이 아이야 뭐 어디에 있든 똑같은 거니까! 내 자식이 여기 있어도 여전히 신의 소유물이야. 만물이 신의 것이니까 내 옆에 있어도 신에게 속하기는 마찬가지잖아! 그러니 애를 내 옆에 두자. 신은 어디에나 계셔! 신은 어디에나 계시니까 내가 바칠 의도를 가진 것만 알아도 신에게는 충분할 거야!”

그건 같은 게 아닙니다. 모자지간의 정이 매우 깊기 때문이지요. 자식과 실제로 떨어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또한 마음을 억누르고 자식을 신에게 바치는 것은 정말로 다릅니다. “마음속으로만 말해도 충분히 좋아요. 애가 어디에 있든 신의 소유물이지요. 그러니 교회에 있든 집에 있든 매한가지잖아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같지 않아요.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신에게 완전히 바치는 것과 말만 하는 것은 같지 않지요. 자신의 마음을 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신은 감동을 받았고 그녀에게 다섯 명의 자식을 더 선사한 것이지요. 원래는 그녀에게 자식이 없었으며 있을 가망도 없었어요. 그런데 결국 여섯을 얻었지요!

단지 자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게 그렇지요. 우리가 탐욕스럽지 않고 모든 것을 억제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나의 개인적 체험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베푼 것에는 모두 보답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도 돌아옵니다. 정말 저절로 보답이 돌아옵니다!

마치 이전에 내가 들려준 이야기처럼 말이에요. 한 농부가 땅을 경작하다가 단지를 하나 파냈어요. 자세히 보려고 꺼내 보았지요. 아! 그건 번쩍이는 순금이었어요. 그는 그것을 한쪽에 두고는 계속 경작했습니다. 그후 집으로 가서 아내에게 말했지요.

“여보! 내 말 좀 들어봐. 아까 내가 금단지를 캐냈어! 굉장히 빛나는 금이 단지 가득 있어.”
“그게 어디 있죠? 어디?”
“아직도 들에 있지. 그걸 파내서 한쪽에 놔뒀거든.”
“당신 참 멍청해요. 그걸 가져오지 않고 왜 거기다 뒀어요?”
“에이! 그게 정말로 우리의 것으로 운명지워졌다면 그게 여기로 ‘기어’올 거야! 그게 내 문으로 기어와야만 내 것이라고 생각하겠어. 파냈다고 해서 다 내 것은 아니란 말이야!”

아마 그 사람은 관음법문을 수행해서 그랬나 봅니다. 관음법문을 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내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지요. 그 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가는 길도 걷기가 쉽지 않아서 아내는 할 말이 없었어요. 농부가 아내를 달래며 말했어요.
“괜찮아. 그게 우리의 것이라면 우리 문으로 ‘기어’올 거야.”
그는 정말로 ‘기어’온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재미있지요! 안 그러면 금이 어떻게 길 수 있겠어요?

둘이 말하는 걸 도둑 두 명이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그 집을 털 생각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너무나 기뻐서 사소한 것은 훔치기 싫어졌어요! 그들은 금단지를 찾으러 황급히 들로 달려갔지요. 들에 가니 정말로 단지가 하나 있었어요. “와! 우린 정말 큰 행운아야. 우린 억만장자가 되는 거야!” 둘은 잠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나서 그 단지를 열어 보았습니다. 아! 안에는 뱀들만 우글거렸어요! 금이라곤 한 조각도 없었지요! 놀라 나자빠져서 즉시 단지를 닫았습니다. 그리곤 단지를 거기에 내버려두고 급히 도망쳤습니다.

다음날 아침, 농부는 다시 들에 나갔습니다. 땅을 갈고 난 뒤 단지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요. 단지를 열어 보니 금도 그대로 들어 있었고요. 그는 다시 단지를 닫고서 그 자리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단지가 그대로 있단 말이야. 누가 안 훔쳐갔어. 할멈은 걱정이 너무 많다니까!”

아내는 몹시 화가 나서 말했어요.
“내가 왜 이리 멍청한 남자와 결혼을 했을까. 금을 또 안 가지고 왔어요? 왜 당신은 늘 그걸 지켜보고만 있는 거예요?”
농부가 말했습니다.
“서두를 것 없어! 내 말 잘 들어. 그게 만일 우리 것이라면 이 문으로 ‘기어’올 거야!”
농부는 계속해서 그렇게 말했어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고 싶어하는 도둑들이 우연히 밖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을 듣고 너무나 화가 나서 말했지요.
“저 양반은 뱀들이 금인 줄 아네! 좋아, 그게 당신 문으로 ‘기어’가게 해주지!”

둘 다 들로 달려갔습니다. 아직도 그 자리에 있던 단지를 열어서 뱀들이 가득 찬 것을 확인하고는 말했습니다. “좋아, 이 뱀이 그 양반 문으로 ‘기어’가게 해주자!” 그들은 힘겹게 그 단지를 농부의 문앞에다 갖다 놓았습니다. 단지를 내려놓기 전에 정말로 금인지 뱀인지 다시 한 번 확인했지요. 그리고는 뿌듯해져서 다음날 벌어질 사건을 고대하며 몸을 숨겼습니다.

아침에 농부가 그 단지를 보고 말했습니다. “어이! 할멈 이거 보라구! 이게 우리 문으로 ‘기어’올 거라 그랬잖아!” 단지를 열자 금으로 가득 찬 게 두 사람의 눈에 보였지요. 그제서야 그 단지를 가져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두 도둑은 그것을 보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어리둥절해졌지요. 결국은 참지 못하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뱀을 금으로 바꾸었지요?” 그때 그것은 뱀이 아니라 진짜 금이었습니다. 이전에 도둑들이 보았을 때는 뱀이었지요.

도둑들은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이건 정말 놀랍군요. 왜 우리가 볼 때는 뱀이고 당신이 볼 때는 전부 금이죠?”

농부가 답했습니다.
“예! 그것이 나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래서 그렇게 변했던 거지요. 그게 내 문으로 ‘기어’온 겁니다! 나는 정말 그걸 원치 않았어요.”
그 농부는 그들에게 미안해서 순금 한두 덩어리를 주었습니다. 그때 그들의 손에 쥐어준 것은 진짜 금이었지요. 단지를 그들이 열었더라면 뱀투성이였을 겁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아세요? 우리가 때로는 일할 때 자연스럽게만 해도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지나치게 밀고 나갈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주 열심히 노력하고도 많은 돈을 벌지 못합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기본적으로 돈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는데도 돈이 계속 들어와서 다 쓸 수도 없게 됩니다. 그 모든 건 사람의 운명 때문이지요.

우리 수행자들은 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지고의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 신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돌봐 줄 것입니다. 우리가 신을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더 편안해질 겁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간에 아주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너무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예수가 곧 십자가에 못박히리란 걸 알았던 것처럼요. 예수는 달아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사전에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얼마 후 너희들은 나를 볼 수 없게 되리라!” 그것은 기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안배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의 신념과 수행 때문에 불행한 상황이 덜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위안을 얻었고, 보험에 들었고, 안전감과 일종의 용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제에 더 용감히 맞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불가피한 문제를 회피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을 결코 회피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운전 기술이 최고라 해도 차 사고가 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운전을 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운전을 못해서 그런 겁니다. 여러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음주 운전을 한 것이죠. 때로는 여러분의 차가 좋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타이어에 펑크가 나거나 돌 위를 넘어가거나 어떤 동물이 들이받거나, 또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차 앞으로 달려들어서 제때에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을 경우 등등.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만일 신념도 수행도 없었다면, 여러분이 일상 생활을 어떻게 헤치고 나갈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왜 여러분 모두 나와 수행하고자 하지요? 여러분이 어떤 이득을 얻기 때문이죠! 마치 아파서 수술이 필요한 것처럼요. 고통스럽더라도 가야만 합니다. 잠시의 고통이 없다면 후에 더 악화될 것입니다. 수술 후에도 여러분은 회복해야 하고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수술 후에 모든 게 좋은 것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일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많은 경험을 쌓은 후에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수행을 하면서 항상 달콤하고 밝은 것만을 달라고 나에게 요구할 순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재미도 없지요!

심지어는 에덴 동산과 같이 편안하고 재미로 넘치는 곳에서도 아담과 이브는 따분함을 느껴서 뱀의 말을 듣고 어리석게도 그 사과를 먹었습니다! 그 맛은 틀림없이 좋지 않았을 겁니다. 전혀 맛이 없었지요. 과일이 그렇게 많은데 그들은 뭐가 부족해서 그 사과 하나를 먹었지요? 모든 게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단지 그 나무의 과일만 먹을 수 없었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겁니다! 너무나 지루해서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다른 것을 원했지요. 무대를 바꾸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가 수행할 때 매우 어렵습니다. 나도 압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 신심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신이 우리를 돌봐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스승의 힘이 보살피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하지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때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먹지 말라고 금지한 바로 그 사과처럼 말이지요. 신이 자신을 위해 사과를 남겨 두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사과가 그들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었어요! 그걸 먹은 후 정말로 마음이 바뀌었고 달라져 버렸지요. 둘 다 불순하고 복잡해졌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알기 시작했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논하기 시작했고, 혼란을 야기했지요. 그들이 어린이처럼 너무도 순수하고 행복했던 때와는 달랐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두뇌는 많은 것들을 원하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게 우리에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형편없는 것들을 요구하고 그것을 얻지 못하면 원망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신께서 나를 돌보시지 않는구나! 스승님께서 나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네!" 그런 게 아닙니다! 심지어 나도 규칙에 따라 일해야 합니다. 나도 수술과 같은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의사도 자신이 수술을 받아야 할 때는 남에게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 의사가 수술 분야의 최고라고 해서 그가 아플 때 다른 사람에게 수술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자신이 수술할 수는 없습니다!

마치 스승 비말라키르티처럼요. 그는 가끔씩 병에 걸렸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지요. “스승님께서는 왜 아프십니까?” 스승이 대답했지요. “중생들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 그는 병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떨 때는 자신도 남들과 같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병에 걸려야만 했지요. 그러지 않았다면, 스승이 되면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으로 인한 온갖 종류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모두들 생각했을 겁니다. 그건 너무 좋지요! 그러면 모두가 스승이 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도 있고, 보통 인간이 될 용기도 없어서이겠지요. 스승이 되면 책임들도 회피할 수 있고 인간의 고통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스승들은 대부분 고통을 겪습니다. 그들은 중생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병과 고통의 일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플 때는 우리의 스승조차도 병에 걸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스승도 그러한데 우리는 어떻겠어요? 만일 어떤 스승이 매일 너무 행복하다면 사람들은 “그는 철이나 동으로 만들어졌나? 그는 우리와 달라. 그래서 그는 수행할 수 있는 거야. 나는 스승과 같지 않은데 어떻게 수행을 할 수 있단 말이야!”라고 의아해 할 것입니다. 다르지 않습니다! 육체적인 구조는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바로 여러분과 같이 아주 평범하면서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비교적 좋은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뿐이지요. 평범한 사람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비교적 그리 좋지 않은 방향으로 그것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겐 인간의 감정이 있습니다. 도를 이룬 스승 역시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이용해서 남을 돕고, 자비를 베풀고, 또한 자신도 감정을 가지고 있으므로 남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는 남들과 동행하면서 단순히 잡담을 나눌 수도 있지요. 잡담 후에는 감정이 더 깊어져서 사람들을 해탈시키기가 더 쉽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우리들은 이 인간의 감정을 사용해서 남과 자기 자신을 속박합니다.

그러니 비록 같은 것이긴 하지만 다르게 사용되는 셈이지요. 돈처럼 말이에요. 두 사람이 같은 금액을 가지고 있는데, 한 사람은 그 돈으로 남을 위협하고, 남의 아내와 예쁜 여자들을 빼앗고, 사람들을 매수해서 몰상식한 짓을 합니다.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고 좋은 일을 합니다. 돈의 가치는 같지만 용도가 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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