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된 세상 > 수행의 길목에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행의 길목에서

거꾸로 된 세상

본문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서유기]에 나오는 산과 강물의 정령들은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수행자의 집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셨다.

한때는 장주자들이 텐트에서 살았었는데, 어느 한 곳에 정착을 해서 우리가 심은 꽃과 나무들이 아름답게 자라 꽃을 피울 무렵이면 우리는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다. 나중에 우리는 스스로 만든 토굴로 이주를 했는데 그때 모든 이들이 드디어는 자신의 작은 세계를 가지게 되었다며 흥분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머리를 짜냈다. 모든 것이 거의 다 정돈되었을 때 스승님은 “남녀 거주지역을 서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는 더 이상 개인 토굴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새 출가복을 만들어 입게 되었을 때, 스승님은 재치있게 “붉은 색은 여자용이고 파란색은 남자용”이라는 통념을 바꾸셨다. 그런 다음 나중에 출가복마저 포기하게 하심으로써 수행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더욱 크게 변화시키셨다.

몇몇 수제자들은 하루에서 일주일 또는 2주일에서 몇 달간 혹은 몇 년간 각기 다른 기간동안 봉사했다. 이것은 명성과 지위에 대한 우리의 집착을 깨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이었다. 우리가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명성과 이익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가 일단 그것들을 갖게 되면 그 즉시 명성과 이익에 대한 욕구가 드러난다. 이처럼 명성과 이익을 향한 욕망은 때로 드러나지 않은 채 숨겨져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하며 하루에 한끼만 먹고 잠을 자지 않고 철야명상을 하는 등 자신의 영적 진보를 자랑하려 한다. 상당기간 이런 식으로 수행을 하면 수행에 있어 모든 능력을 얻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내면에 더욱 완고한 자만심만을 쌓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한테 적절한 때에 주저 없이 무지와 집착을 깨뜨리시는 스승님이 계신 것이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스승님은 또 부엌을 교실로 활용하시어 집착 없이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버리는 것임을 알게 하셨다. 우리가 처음 승단에 합류했을 때 부엌은 두 개의 큰 남비만이 덩그러이 놓여 있는 커다란 하나의 빈 화폭이었다. 나중에 스승님의 창작품으로 얼마간의 돈이 들어왔을 때 스승님은 우리를 위해서 현대식 주방설비와 소파가 구비된 아름다운 부엌을 만드셨다. 그래서 더는 비바람 속에서 곤란을 겪지 않게 되었다며 더없이 기뻐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몇 달 후에는 캄보디아로 떠나게 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예전의 단순한 방식으로 돌아갔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행복했다.

스승님을 따르기 이전에 우리는 성심으로 명상하면서 아주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이 이상적인 수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속세를 떠나 처음으로 승단에 들어왔을 땐 속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조용한 곳에서 자기수양을 하게 될 거라고만 여겼었다. 그러나 단순한 삶이 가장 편안한 삶이라는 걸 깨닫게 되자마자 우리는 뜻밖에도 속세로 돌려보내졌다. 스승님이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교훈을 배우게 하신 것이다. 사회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는 양복과 넥타이를 매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좋아했던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기에 우리에게는 커다란 희생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세속의 삶이란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모든 것들이 수행의 교훈이 된다는 것을 점차로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전에 우리가 버렸던 것들을 하나씩 집어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스승님은 단순한 옷차림을 좋아하시지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들을 걸치신다. 사실 이러한 것들은 스승님께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인데 말이다. 속세의 삶을 버리셨지만 사회적인 활동을 계속 해나가시는 스승님이야말로 진정 완전함의 표상이다. 과거의 스승들은 제자들을 눈 속에서 얼게 하고 지옥고를 제거해 주려고 팔을 태우게 하고 고기 먹고 술을 마시는 척하여 제자들의 갖은 비난과 의심의 표적이 됨으로써 안 좋은 평판과 무자비하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들이 사람들의 그릇된 수행 관념을 깨기 위한 방편이었다. 우리는 고대 스승들의 이런 고통어린 노력들은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영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다른 수행자들이 마다하는 많은 일들을 하시며 자신의 명성을 희생하시는 칭하이무상사와 같은 스승을 언제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고대로부터 모든 깨달은 스승들이 강조하기를, 수행은 세 가지 측면을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평범함과 근면함과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근면함을 수행의 척도로 삼으며 다른 두 측면은 간과해 왔다. 하지만 진정으로 깨달은 자만이 진정으로 평범할 수가 있다. 그래서 위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느린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그러할 때만 더러움 속에서도 빛 가운데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여전히 수행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평판이나 시비를 의식하며 산다면 우리는 평범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스승님마저도 우리의 선입관에 끼워 맞추려 한다. 그리하여 스승님의 행동이 그 틀에서 벗어나 있을 때는 평범함을 결여한 수행은 완전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승님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만다.

부처(완전히 깨달은 존재)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신이나 유령, 왕, 관리, 속인, 아내와 하인 등 온갖 종류의 존재로 화현한다고 법화경에 분명히 기술되어 있다. 중생에게 이로움이 되는 한 평범하다든지 천하다는 개념조차 없는 것이다. 스승님은 노래, 무용, 작곡, 장기, 시화와 의상 등을 통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모범을 보이셨다. 그러므로 진정 스승님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완벽한 법화경의 연출자이시다.

-뉴스잡지 97호에서-


Copyright © Supreme Master Ching Hai International Association.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