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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준수의 중요성


나를 따라 수행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라도 채식과 오계는 지켜야 인간으로 다시 올 수 있습니다. 인간으로 돌아오고자 한다면 오계를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계율을 어긴다면 인간보다 낮은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마치 학교에 가는 것과 같지요. 초등학교가 있는가 하면 고등학교도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가려면 어떤 자격 기준을 갖춰야죠? 또한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입학하는 데는 어떤 기준이 있죠?

재능을 타고난 어떤 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 곧바로 대학교로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곧장 대학교로 뛰어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인재는 극히 드뭅니다. 몇몇 성불한 사람들은 아직 젊은데도 오랫동안 수행을 해왔지요. 하지만 그들이 바로 성불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나무불상이 아닌 (스승님, 글자로 농담하심) 타고난 성인이었지요. (스승님 웃음)

예를 들어서 칭하이 무상사를 따라 수행하긴 너무 힘들고, 앉아 있는 시간도 너무 길고, 채식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계만이라도 지킨다면 괜찮습니다. 오계란 살생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고 일부일처를 유지하라, 술 마시거나 노름하지 말라 등을 말합니다. 그것을 지킨다면 언젠가 다시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를 위해 계율을 지키라고 여러분을 위협하거나 강요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계율을 지킬 수 있다면, 성인이나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지 않더라도 인간으로 환생해서 건강하고 행복하며 덜 고통스럽게 살아갈 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우리의 수준이 인간보다 낮다면 다른 존재로 환생할 것입니다. 짐승이나 귀신이나 악마 같은 존재들 말입니다. 그들은 다 인간보다 한 단계 낮지요. 만일 우리가 오계를 다 지키고, 보다 많은 세세한 계율들까지 지키기 위해 계속 수행해 나간다면 성인이나 부처가 될 자격을 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간혹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구와도 동침한 적이 없고 다른 사람의 아내와 동침한 적은 더더욱 없으니 계율을 전혀 어기지 않았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만으로도 혹은 색욕이 깃든 눈길 한 번만으로도, 그것이 고의적이라면 이미 계율을 어긴 것입니다. 모르고 무심코 한 경우에는 계율을 범한 정도가 덜하겠지요. 그래도 전혀 어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계율을 범한 것이며 단지 그 정도가 덜한 것뿐입니다.

이미 결혼해서 자식까지 두었는데도 의도적으로 감언이설이나 눈길로 다른 사람을 유혹하거나, 마음속에서 불결한 것을 떠올린다면, 그것만으로도 계율을 어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계율이란 신,구,의(행동, 말, 생각)를 다 포함하는 것이지 행동만 지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이 행동을 낳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지요. 생각이 없다면 우리의 몸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율을 범하는 데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세세한 것은 두뇌로부터, 비교적 거친 것은 우리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며, 말까지 더해진다면 그땐 끝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다시 인간으로 환생하고 싶다면 계율을 제대로 지켜야만 합니다.

누구의 손이나 발도 만지지 않았고, 아무와도 키스하지 않았다고 해서 계율을 지킨 것은 아닙니다. 어디를 가든 고의적으로 욕망 어린 생각으로, 색욕을 가진 눈으로 남을 계속 쳐다본다면 계율을 어긴 셈입니다. 분명히 말해서 그것은 계율을 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나쁜 습관으로 길들였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몸 세포에 기록된다

우리의 두뇌는 한번 그렇게 길들여진 방향으로 자동적으로 계속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새롭게 훈련시키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몸은 두뇌의 움직임에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포는 우리의 두뇌가 생각하고 주의를 기울인 것은 모조리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록은 우리의 유전자와 세포와 신체에 남아 있게 되지요. 그렇게 날마다 더 많은 기록들이 쌓여서 점점 더 씻어내기가 힘들어집니다.

알콜 중독증 환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술을 끊기가 얼마나 힘든지를요. 술을 마실수록 끊기가 더 힘들어져요. 담배 피우는 사람들도 습관이 되어서 그 습관 때문에 계속 담배를 피우게 됩니다. 두뇌에 이미 기록이 된 다음엔 두뇌가 이렇게 말합니다. “어? 어떻게 오늘은 아무것도 안 들어올 수가 있지? 매일 몇 밀리그램의 니코틴이 들어 왔는지 정확하게 기록하는데 말이야, 왜 오늘은 아무것도 없는 거야?” 두뇌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집니다. 결국은 습관으로 굳어지게 되지요. 혼외 관계를 가지는 남녀의 경우도 마찬가집니다. 그것도 일종의 나쁜 습관이 될 수 있겠지요. 남을 유혹하는 추잡한 습관 말입니다.

그러한 것을 육체가 계속 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도 많이 기록되어 있어서 온몸과 온 세포가 그런 것을 계속 갈망합니다. 그때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약해서 맞서 싸울 수가 없지요. 그래서 자신의 길에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맙니다. 많이 넘어질수록 그만큼 아래로 끌어내려지게 됩니다. 그러다 너무 무거워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반드시 환생해야 합니다. 채워질 수 없는 그 욕망들을 채우기 위해 다시 인간으로 환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실컷 두들겨 맞고 쓰러지고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맛보고 나서야 제정신이 들어서, 그것이 지겹다는 것을 알게 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됩니다.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몇백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즉각 경계심을 갖도록 자신을 훈련시켜라

그러니 두뇌가 우리를 그런 쪽으로 몰아갈 때 스스로 경계해야만 합니다. 즉각 자신을 일깨우고 오불을 외우세요. 재빨리 옳은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두뇌가 지시하는 대로만 복종한다면 계속 끌려 내려가게 됩니다. 명상을 한다 해도 쓸데없는 노력에 불과하지요. 우리는 하루에 겨우 두 시간 반 명상하는데 그나마 충분히 오랫동안 앉아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으로 하루종일 자신을 끌어내린다면 우린 정말로 낮아지게 됩니다. 두뇌는 스물한 시간이나 스물두 시간 동안 우리를 잡아당기는데 우리는 겨우 두 시간 반 동안만 잡아당기지요. 그나마 명상하면서 시간이나 재고, 머리는 앞으로 뒤로 꾸벅이면서 말입니다. 그건 절대로 충분한 시간이 아닙니다. 두 시간 반이라는 것은 순수한 삶을 살도록 자신을 훈련시키는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즉각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두뇌가 우리를 완전히 낚아챌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만회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밖에 나가서 부주의로 잘못된 음식을 먹곤 합니다. 채식 음식과 비슷하면 뭐든지 먹어요. 우리가 아직 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차이를 구분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 정화된다면 맛만 봐도 즉각 그 차이를 알아챌 것입니다. 잘못된 걸 먹으면 나중에 토하거나 몸이 불편해집니다. 그러면 그날 불순한 것을 먹었다는 사실을 즉시 알게 되지요. 어떤 때는 밤에 명상하다가 소름이 끼치거나 낮은 차원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도 그 이유를 금방 알게 되지요. 또 어떤 때는 내면의 스승이 나타나서 그날 불순한 것을 먹었다고 말해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면의 스승을 볼 수 있다면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스승을 전혀 볼 수 없다면 그 스승이 우리 앞에 나타나서 말해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분명 그 자리에 있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합니다. 스승은 하루 스물네 시간 늘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멀고 귀먹어서 아무것도 듣지 못하지요. 두뇌의 나쁜 기록에만 귀를 기울이니까요. 만일 모든 사람들이 내면의 스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계율을 어기거나 유혹에 빠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스스로 싸울 기회를 줍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직접 선택한다면 여기에 앉아 있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경지가 높은 수행자도 밖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위 환경의 자장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밖에도 온갖 것들이 주위에 널려 있으니 수행을 한다는 게 늘 쉬운 일만은 아니지요. 그런데 수행 자체가 우리에겐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문제만 더 일으킨다면 정말 끝장입니다.

그러면 신과 불보살조차도 도울 수가 없습니다. 계율을 어기면 누가 우리를 해롭게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등급을 스스로 떨어뜨리게 됩니다. 언젠가는 스스로 다시 끌어올려야 합니다. 마치 학생이 공부는 열심히 안 하고 학교 안팎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 학생은 같은 학년으로 유급되거나 학교에서 쫓겨날 게 뻔합니다. 그 학생은 바깥 세상에 싫증이 난 후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착한 학생이 되었다는 것을 선생님께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자기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채식을 하고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 열심히 수행하면 때로 고기가 든 음식을 모르고 먹더라도 즉시 알게 됩니다. 집에 가 보니 얼굴에 여드름이 많이 나 있을 수도 있겠죠. 어쩌면 밤에 잠자는 동안 귀신들이 와서 발을 잡아당길 수도 있고요. 명상하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완전한 암흑만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복통이나 두통을 동반하는 병에 걸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스승에게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스승님 웃음)

사실입니다. 믿음을 잃고 떠난 사람들을 한번 조사해 보세요. 그들 중 99 퍼센트는 잘못된 음식 섭취나 계율 위반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점차적으로 나로부터 멀어지다가 완전히 떠나는 겁니다. 서로 반대 방향의 길이기 때문에 더 많이 걸어갈수록 그만큼 서로 멀어지는 법이지요. 우리가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고 해도,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은 북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남쪽으로 가는데 어떻게 서로 다시 만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사실은 여러분이 나를 떠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진아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자장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좋아할 수 없게 되는 거지요. 유유상종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은 곧장이든 나중이든 언젠가 우리를 떠납니다. 그러니 진실로 나를 떠난 이들은 나를 떠나는 게 절대 아닙니다. 그들의 진아를 떠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상과 맹세를 버리고 말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영광스럽고 품위 있는 길을 버리고, 끝도 없이 깜깜하고 미래도 없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선택할 자유가 있고, 아무도 남의 의지를 억지로 꺾지는 못하지요. 그래서 나는 입문식에서, 평생 이 길을 따르라고 여러분에게 절대 강요한 적이 없습니다. 강제적인 건 조금도 없었지요. 난 단지 조언만 해준 것뿐이었죠. 여러분이 선택한 이 아름다운 길을 계속 가라고 조언해 주었지요. 그렇지 않고 다른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면 잘못된 선택입니다. 그렇게 되면 후에 우리는 서로 멀어지게 됩니다.

여러분은 나를 떠난 이들을 즉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다시 고기를 먹게 됩니다. 둘째로는 계율을 어깁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먹는 것을 대변하기 때문에 그들의 자장이 우리의 자장과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성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은 동물이 죽임을 당할 때 생겨난 독소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먹은 우리도 중독되고 병에 걸리게 됩니다. 그건 단지 육체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고, 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동물의 의식은 인간의 의식과 다릅니다. 또한 식물이나 야채의 의식 수준은 미약하지만 동물은 비교적 강한 의식을 소유하고 있지요. 동물들은 살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고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들 나름의 비교적 강한 자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물들은 어떻게 걷고 어떻게 짝을 지으며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성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울 줄도 압니다. 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재산이나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싸울 줄도 압니다. 풀이나 나무는 절대로 그런 것을 놓고 싸우지 않습니다. 보다 정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냥 가만히 서 있기만 해요. 바람이 자신의 꽃가루를 옮겨 주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기를 그저 바랄 뿐입니다.

반면에 동물은 보다 동적이지요. 동물은 본래부터 번식을 위해 이성을 찾아다닙니다. 나름대로 질투심도 있고 극도로 잔인한 소유 본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동물들은 더욱더 잔인합니다. 코끼리나 토끼 같은 동물들은 극도로 화가 났을 때만 물거나 덤벼듭니다. 그런데 호랑이는 어떻지요? 말할 필요도 없어요. 우리가 건드리지 않아도 먼저 우리를 건드리지요.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찾아다닙니다. 그게 안 될 때는 다른 동물을 찾아나서지요. 예를 들면 그런 식입니다.


동물의 본성과 자장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우리가 채식을 하면 업장의 무게가 덜해집니다. 채식을 하면 고기에 들어 있는 잔인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동물은 자신의 자장과 야만적인 본성 때문에 동물 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동물의 지능은 인간의 지능과 다릅니다. 동물일 뿐이기 때문에 감정과 반응도 모두 다릅니다. 동물은 말 그대로 동물의 몸 구조와 자장과 의식 수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기를 먹으면 그 동물의 수준이 우리와 섞이게 됩니다. 만일 계속해서 고기를 더 먹는다면, 언젠가 동물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보다 더 커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후에 동물로 태어날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미신이 아니라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불교를 논하거나, 인과를 통해 다른 종으로 환생하는 것을 언급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예를 들어 순수한 물이 한 컵 있다고 칩시다. 그 안에는 물만 있습니다. 거기다 잉크 몇 방울을 떨어뜨린다고 해도 여전히 물은 깨끗하겠지요. 그런데 네 방울, 다섯 방울, 여섯, 일곱 방울을 계속 떨어뜨린다면 즉시 컵 전체가 잉크와 똑같이 어두운 색으로 변할 것입니다. 잉크로 변하는 것이지요. 잉크 방울을 더 많이 떨어뜨릴수록 점점 더 잉크에 가까워집니다. 아예 그 잉크로 글을 쓸 수도 있습니다. 잉크의 본성은 물의 본성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은 동물의 본성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동물의 본성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다면 후에 동물로 태어납니다. 적어도 80 퍼센트가 동물의 본성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약 70 퍼센트만 되어도 틀림없이 동물로 태어납니다. 왜냐하면 동물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60에서 70 퍼센트인데도 여전히 인간으로 남는 경우도 있는데, 그들은 동물의 본성 쪽이 더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의 본성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서는 인간의 미덕을 찾아볼 수가 없지요. 살인자, 도둑, 사기꾼, 그리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일삼는 사람들을 그 예로 들 수가 있겠지요. 그들에겐 그런 것들이 일종의 나쁜 습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인간이긴 하지만 동물의 본성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동물들은 비록 동물이지만 인간과 좀 비슷한 수준의 지능과 지혜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인간의 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다른 동물들보다 인간의 품성을 더 많이 가지게 된 거지요. 동물의 본성을 80 퍼센트 정도 가지고 있다면 인간보다는 동물에 더 가깝게 행동할 것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본성을 약 40이나 45 퍼센트 정도 가지고 있는 동물은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인 상태가 됩니다. 그런 동물들을 보면 아주 영리하고 감정이 풍부하지요.

그런가 하면 동물을 닮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동물처럼 되도록 자신을 훈련시킨 결과입니다. 그들은 동물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웁니다. 자신의 동물적인 본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동물적인 본성을 너무 많이 쌓았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동물이 되고 맙니다. 비록 모습은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실제로는 인간과 거리가 멀지요. 훌륭하고 예의 바른 인간의 품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지요. 부도덕한 일을 하고 부끄러워할 줄도 모릅니다.

이제는 내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수) 내가 억지로 여러분에게 이런저런 계율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단지 나의 조언입니다. 고대로부터 비밀리에 지켜져 온 영적인 수행법과 지혜가 깨달은 스승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수되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주 진화의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이 자연의 법칙을 알게 되면 순조로운 삶을 누릴 것입니다. 어떤 법칙도 위반하지 않았다면 어떤 처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미국에 산다면 미국의 법을 알아야 하듯 말입니다. 예를 들어 경솔하게 운전하다가 경찰에 붙잡혀서 1년간 면허정지 처분을 받을 수 있지요. 우리는 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위반한 것입니다. 어떤 때는 운좋게 처벌을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쉬운 게 아닙니다. 어쩌다 한두 번쯤이라면 몰라도, 그 나쁜 습관을 계속 유지한다면 언젠가는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에 걸려듭니다.


자신을 통제해서 자신의 주인이 되자

계율을 어겼다면 빨리 자신을 추스려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마음으로만 계율을 어겼을 뿐, 그것이 행동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만일 행동으로 계율을 어긴다면 그것을 바로잡을 방도가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엄한 게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어차피 여러분의 삶이니 여러분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의 자유가 있어요.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그에 대한 결과가 따른다는 걸 명심하세요. “나는 이 길을 택한 거야. 나는 위대하지. 나는 자유의 몸이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래요. 우리는 살인할 자유도 있고 도둑질할 자유도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갈 자유도 있지요. (박수)

모두가 부처이고 신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이 지상에서 누구도 다른 사람을 막을 권한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신성과 불성을 알아야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통제해서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부처와 신의 기준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남을 가르치는 것은 아주 쉬워요. 고대로부터 깨달은 스승들은 모두 자신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스승이 된다면 남들이 우리의 자장과 힘에 저절로 이끌려 올 것입니다. 말로만 아무리 떠들어도 아무도 우리를 믿지 않지요. 실로 행동의 힘은 말보다 큽니다. 미국의 철학자인 에머슨은 이런 말을 했지요. "그대의 행동의 힘에 감동되어 그대의 말을 들을 수가 없군요."

여러분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신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고자 바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옳은 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바라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본성입니다. 육체적인 모습은 본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행동, 그리고 그 사람을 대변해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 때, 처음에는 육체적인 모습에 이끌리다가도 아주 오랫동안 같이 산 뒤에는 더 이상 외모가 아니라 그의 사랑과 좋은 성격과 삶의 방식에 이끌리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적인 외모를 날마다 보다 보니 익숙해져서 아무리 빼어난 외모라고 해도 식상해지고 마는 것이지요. (박수)


칭하이 무상사 / 미국 LA 센터 1997. 7. 13. (원문 어울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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