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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일깨우는 말씀 죽음과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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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엔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어떤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소위 ‘죽음’의 체험과 깨달음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우리가 죽을 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몸만 바꾸는 것이지요. 어떤 땐 잠시 동안 육체로부터 떠나 있기도 하고, 어떤 땐 오랫동안 수백, 수천 년 동안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 후 우리의 지혜와 경험을 표현하고자 이 육신이라는 도구를 통해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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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매일 죽는 것이다

성경에서 한 성인은 매일 죽는다고 했습니다. 어떤 구절에서는 생명을 얻으려면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으며, 또 다른 구절에서는 생명을 버리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접하면 몹시 당황하게 됩니다. “살기 위해서 죽어야 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매일 죽을 수 있단 말이야? 생명을 얻기 위해서 생명을 버려야 한다는 게 말이나 돼?”

여러분은 ‘사후의 세계’라는 책을 읽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 책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어느 미국 의사가 수집해서 펴낸 책인데, 그들은 대부분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죽거나 육체를 떠난 후 크나큰 환희와 자유를 느꼈다고 합니다. 즉 터널같이 생긴 차를 타고 머나먼 나라로 날아가 빛과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체험할 때도 어느 정도 이와 비슷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매일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높은 세계의 진동과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주에서 유일한 존재도 아니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가 살아온 유일한 삶도 아닙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체험을 했다는 뜻은 그 순간 높은 세계와 연결되어, 영광된 세상에서 영광스런 옛 체험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인간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부처, 천사, 성인, 보살이기도 했습니다. 보살(Bodhisattva)은 기독교의 성인에 해당되는 말로 원래는 산스크리트어입니다. 보디사트바(Bodhisattva)에서 보디(Bodhi)는 ‘깨달은’이라는 뜻이고, 사트바(Sattva)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여러 생을 살았습니다. 한때는 아주 영광스럽고 문명이 발달한 세계에서 살았지만, 이 세상에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모두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면 이런 과거를 기억하게 되어,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우리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였는지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이 죽을 때의 경험도 똑같습니다. 죽음을 경험할 때 사람들은 대부분 영화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지난 인생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세계에서 이번 생밖에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깨달은 사람은 수백, 수천 생을 거슬러 올라가서 볼 수 있고, 이 세계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체험을 한 사람은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부처나 신의식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천국의 아들이라고 말했고, 부처도 깨달은 존재인 부처라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부처는 그리스도와 같은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은 신의식에 도달했다는 뜻입니다. 부처는 산스크리트어이고, 예수는 히브리어일 뿐 둘 다 똑같은 말입니다. 이런 이해와 지혜의 수준에 이르면, 우리가 예수이고 부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과 같은 체험밖에 할 수 없습니다. 육체를 벗어나면 아수라 세계에 가거나, 기껏해야 그보다 약간 높은 세계에 갈 뿐입니다. 하지만 매일 수행해서 높은 깨달음을 얻으면 높은 세계에 갈 수 있습니다. 그곳은 높은 지혜와 영광이 있는 곳이지요.

예수는 “아버지 집에는 많은 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 바로 이런 뜻이었지요. 성경에도 어떤 사람이 3세계에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성경에 몇 세계까지 있다고 언급되어 있진 않지만, 3세계가 존재한다면 2세계와 4세계는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도 여러 불국토가 있으며, 그 불국토에는 여러 등급이 있다고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면 아미타불 정토가 있습니다. 이곳은 가장 낮은 곳부터 높은 곳까지 9단계로 나눠져 있습니다. 수행과 공덕이 부족한 사람은 가장 낮은 등급에 수천 년 동안 머물러야 합니다. 보다 높은 부처나 깨달은 존재에게 매일 배워서 깨우쳐야 비로소 제일 높은 등급에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와 비슷합니다. 고등학교처럼 여러 학급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체험’은 우리가 죽을 때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육체를 잠깐 빠져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미국 의사가 쓴 ‘사후의 세계’에 나온 사람들도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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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준비하자

죽음이 그토록 고통스럽고 힘겨운 것은 죽음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죽는 방법을 배우면 죽음은 아주 즐거운 일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 이 세상을 잃을까봐 몹시 두려워합니다. 훨씬 멋있고 아름다운 세상, 더 행복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익숙해진 주위환경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체와 육체 간의 갈등을 일으켜 고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기다리겠지요. 그럼 그 아름다운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출산과 결혼은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습니다. 사실 죽는 날이 가장 큰 날입니다. 이날이 가장 중요한 날이어야 합니다. 태어날 때는 단지 육체가 있기 때문에 자유도 제한되고 성장도 빠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을 때는 엄청난 자유를 누리게 되고, 더 아름답고 자유로운 몸과 높은 지혜와 아름다운 세상을 얻게 되어 그곳에서 쉬고 배우면서 진보를 이룰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이란 실제로 진화를 촉진하고, 높은 지혜에 빨리 오를 수 있도록 하는 바람직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선하고 즐겁게 살아야 물질적인 세상을 떠날 때 아무런 후회나 죄책감, 집착 없이 보다 빠르고 편안하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육체를 떠날 때는 고통을 수반한 여러 가지 장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놔두고 떠나야 한다는 슬픔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는데, 그 슬픔이 몇 달이나 몇 년 동안 지속됩니다.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친구들과 헤어져 봤기 때문에 이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그들의 삶이 더 나아졌는지, 또는 그들을 돌봐줄 사람이 있는지를 모르니까요. 그래서 죽은 영혼에 대해 슬퍼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감정은 죽은 영혼의 마음을 억누르고 가로막아 기쁨을 줄이고 자유를 제한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며 올바른 방법입니다. 물론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이것이 보다 높은 희생과 사랑입니다. 그 사람이 ‘감옥’, 즉 육체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기뻐해야 됩니다. 영혼은 자유롭게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고, 많은 지혜를 배울 수도 있으며, 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사후의 세계를 엿볼 수 없기 때문에, 친구나 친척들의 죽음을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사후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죽는지 배울 수 있지요. 이 세상 너머, 다른 차원에 있는 행성에 가는 법을 배우면 사후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이 어디에 갔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다음 갈 곳을 선택할 수도 있고요. 이렇게 되면 죽음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이 죽어도 울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울기는 해도 깊은 슬픔에 빠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신 기쁨과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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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은 후의 삶은 더욱 긍정적으로 된다

이 세상 너머의 체험을 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부릅니다. 깨달음에는 여러 단계가 있습니다. 힘이 있는 스승에게 입문하면 이런 깨달음의 체험을 어느 정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휘황찬란한 세계를 볼 수도 있고, 마치 우리가 죽을 때처럼 육체를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죽을 때와 똑같은 체험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죽음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이 떨어지고, 무거운 슬픔과 절망감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되돌아온 다음에는 더 좋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세상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삶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울하다거나 죽고 싶어서 이 세상에 흥미를 못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삶은 하나의 연속된 과정이고, 죽음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용기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게 되고, 남에게 이익을 주는 충만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 경전을 보면 성인들이 중생에게 이로움을 주려고 밤낮없이 일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중생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인생을 바치고 지혜와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특히 영적인 측면에서 말입니다.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세요. 그가 천국의 위대한 아들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의 삶을 보면 성인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매일 이곳저곳 걸으면서 많은 어려움과 가난을 견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진리를 전하고, 사람들에게 신에 대해 일깨우기 위해서요. 하지만 예수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가 신통력으로 빵을 많이 만들어서 5만 명을 먹이고, 맹물을 포도주로 만든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가난하게 지낼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진리와 신의 섭리를 전파하고, 중생을 절망과 무지로부터 구원하려고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자, 이제 부처가 어떻게 살았는지 봅시다. 부처가 가톨릭교도나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는 무엇을 했지요? 예수와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불경을 읽어 보면 부처도 무한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속세에서도 아주 높은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는 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포기한 채 가난과 곤경을 무릅쓰면서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진리를 전하려고 탁발도 했습니다. 부처에겐 먹을 게 없어도 되었지만 부처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적게 공양한 사람이라도 부처의 은총을 받게 되었고, 무아의 보시를 배웠던 것입니다. 예수와 마찬가지로 부처도 탁발을 다닐 필요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런 선물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부처가 그렇게 한 덕분에 사람들은 축복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왜 예수와 부처는 이렇게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일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깨달음을 통해서 행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즐거운 체험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겠지요. 예수와 부처는 무지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무지하면 실수도 많이 하게 되고, 범죄도 저지르게 됩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범죄자가 없습니다. 제일 큰 범죄자는 바로 무지입니다! 사람들이 생명의 비밀을 알고, 어떻게 생명을 사랑하는지를 알고 깨달음을 얻는다면, 절대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수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무지를 비난해야 됩니다.

그래서 성인들이 사람들을 나무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신 본성을 아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서 무지에서 벗어나 지혜를 사용하게 해준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겐 내면에 숨겨진 지혜가 있으니까요. 신의 왕국을 찾았을 때는 자기 혼자 수행하건 스승의 안내를 받건 충만감을 느끼게 됩니다. 큰 사랑을 느끼게 되어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옛 성인들이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서 온갖 비난과 오해와 고통을 겪고, 때로는 목숨이 위태로우면서도 열심히 일했던 것입니다.

예수, 소크라테스, 부처의 경우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죽이고 모욕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성인들은 항상 사람들을 위해서 참았습니다. 성인들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최고의 정치가였지만, 그들은 세상에서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왕관 없는 왕이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왕국은 천국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처는 세속의 왕국을 버렸지요. 우리가 신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더 위대한 왕국이 내면에 있었으니까요. “먼저 신의 왕국을 찾아라! 그러면 모든 것이 너에게 더해지리라”고 했는데, 이것은 정말 사실입니다.

신의 왕국을 얻은 다음에는 지상의 왕국에 흥미가 없어집니다. 예수가 사막에서 명상하고 있을 때를 생각해 보세요. 그때 마야의 왕인 사탄이 예수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나에게 절하면 너에게 삼계에 있는 왕국을 모두 주겠다.” 하지만 예수는 “내 뒤로 가라”고 말했지요. 이 말은 ‘저리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것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1세계가 아니라, 삼계의 왕국을 다 준다 해도 말입니다. 사탄은 3세계를 포함해서 삼계에 있는 왕국을 다 준다고 했지만 예수는 거절했습니다. 부처가 보리수 밑에 49일 동안 앉아 있을 때, 부정적인 힘이 온갖 것을 주면서 그를 유혹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깨달은 영혼을 왕이라고 받들지만, 그것은 세속의 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무지와 질투 때문에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두들 머리 속에 무지와 질투가 뿌리박혀 있으니까요.

예수가 살아 있었을 당시 많은 정치가들이 질투를 했습니다. 예수를 오해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가 세속적인 명예를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면 예수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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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전화’ 연결을 하다

깨달음은 항상 필요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필요하고 천국에서도 필요합니다. 중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수신(修身)', 이 말은 먼저 자신을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신(修身)하면 자연히 세계 평화에 공헌하게 됩니다. 평화는 세상에 저절로 흘러넘치게 될 테니까요.

어떻게 매일 수신(修身)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무척 간단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계율을 지키면 됩니다. 실패하면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예, 인도해 달라고 언제나 신과 부처에게 향하세요. 부처란 과거, 현재, 미래의 깨달은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부처에게 신실하게 도움을 청하면 도움을 받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나 절에 기도하러 갑니다. 하지만 이런 부처나 신의 힘을 만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감응이 없는 것입니다. 신과의 연결이 끊겼으니까요. 전화선이 연결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전화기에 대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크게 소리를 지르면 옆사람은 듣겠지만, 통화하고 싶은 사람은 못 듣지요. 반면 전화가 연결되어 있으면, 아무리 멀리 있는 사람과도 통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이 멀리 떨어져 있고, 깨달은 스승이 아주 높은 불국토에 있어도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으면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신과 연결되어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입문’이나 진정한 ‘세례’를 통해서 신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나 예수가 세례를 했던 것처럼요. 그래서 스승의 육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육체가 필요 없었으면 예수나 부처는 물론 다른 성인들도 여기 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성인들은 우리가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인들이 대답하는 것을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 천국과 지구를 연결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성인이 세상에 내려와도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는 않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따르지는 않지만, 몇몇 사람은 가르침을 받으러 옵니다. 마치 공중전화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요. 그래서 개인 전화가 없더라도 공중전화로 다른 사람과 통화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인을 따르는 사람들, 즉 높은 등급의 제자들은 천국과 지구의 연결고리 역할을 합니다. 많지는 않아도 쓸모가 있습니다. 물론 많으면 더 좋겠지만요.

그래서 우리에게 전화가 있으면 언제라도 직접 천국과 통화할 수 있습니다. 예수와 부처 같은 스승들은 이런 역할을 한 것입니다. 천국과 ‘전화’를 연결하기 때문에 기도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직관적으로도 알 수 있고,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수행과 이해력의 등급에 따라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식 수준이 높고, 어떤 사람은 낮으니까요. 이런 의식 수준은 그들의 배경과 이 생에서 수행한 힘에 따라 결정됩니다.

흔한 병에 걸렸어도 치료가 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약도 없는 새로운 병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런 불치병은 전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의사나 과학자들은 현재를 초월하여 아득한 과거로 갈 수 없기 때문에 병의 근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의사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치료하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병이 왜 발생했는지 그들의 지혜나 이해력으로 치료하겠지요. 예, 어떤 사람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지혜안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나 수행했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그들의 영혼이 높으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초보자라면 명확하지는 않아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이 항상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신의 왕국, 신의 힘과 접촉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생에 해낼 수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고통스러워하면서 기다릴 필요는 없습니다. 천국에 가려고 죽을 때를 기다린다면 배우는 것도 별로 없고, 의식 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생에서 죽는 법을 배우면 높은 지혜를 얻을 기회가 더 생깁니다. 취미나 학문을 배우는 것처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무를 다하면서 조금씩 배워 나갈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생활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이 세상 너머의 과학을 배우려면 매일 어느 정도 시간을 내야 합니다.

이 과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학력과 재산이 필요 없습니다. 모두 무료지요. 지혜는 우리 내면에 있으니까요. 그래서 진정한 스승은 제자들에게 돈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가진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분 집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말해 준다고 해서, 내가 그 보물을 가질 권리가 있나요? 나는 아무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보물은 여러분의 것이니까요. 나는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서 여러분에게 말해 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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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힘은 살아 있는 스승을
통해서 작용한다

신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불성은 우리 내면에 있어요. 성서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너는 신이 거하는 신전이며 너희 안에 성령이 있다는 걸 명심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있다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어봐야 됩니다. 성령은 왜 우리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고, 우리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듣는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좀더 낫게 살 수 있도록 왜 보살피지 않았는지 물어야만 합니다. 성령은 사력을 다해서 우리를 도와주려 하지만 우리는 도움을 청하지 않거나 잘못된 방법으로 도와달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요,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은 매일 집과 교회를 오가며 기도하는데, 아무것도 못 얻을까요? 여러분은 예수가 한 말을 잊었던 것입니다. “구하라! 하지만 내 이름으로 구하라. 그러면 신이 너에게 줄 것이다.” 꼭 예수의 이름으로 신을 구해야 할까요? 그리고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가 신보다 더 우월하다는 뜻인가요? 그래요?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가 할 일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그냥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먼저 비서나 약속을 담당하는 직원에게 요청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다고 비서나 직원이 대통령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일이니까요.

이제 여러분은 나에게 와서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매일 예수에게 기도를 해요. 우리는 가톨릭 국가이고 기독교 국가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당신은 불교도니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불교도가 아닙니다. 나는 ‘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기독교도나 불교도는 모두 신을 믿는 사람입니다. 단지 여러 나라에서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아내를 ‘쿠에리다’라고 부르고 미국에서는 ‘마이 와이프’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에서는 ‘타이타이’라고 부르고, 어울락어로는 ‘보토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의 대상에 이름이 여럿이지요.

매일 예수의 이름으로 신에게 기도하는데 왜 은총과 빛이 없을까요? 그것은 예수가 물질적인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할 일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메시아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가 이 세상을 떠난 뒤 온다고 약속한 사람을 말입니다. 메시아는 예수가 못다한 일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한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영원한 빛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나중에 메시아를 보내 준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에게 소중했던 그분을 대신해서, 적어도 비슷한 능력과 자질로서 우리를 구원해 줄 그 누군가를요. 그러니까 예수가 말하려고 했던 건, 그가 떠난 뒤 빛을 전해 줄 또 다른 사람이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오기 전에도 빛을 전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전생에 예언자 엘리야였느냐고 물어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알겠어요? 같은 영혼, 같은 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내가 살고 있지만, 이건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같은 영혼이 다른 육체를 가지고 일한다는 뜻입니다. 위대한 성현들이 신, 불성, 아버지와 모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단계에 이른 깨달은 스승은 모두 부처입니다. 왜냐하면 성인들은 그들이 가진 지혜와 능력을 똑같이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렇게 깨달음의 체험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는 기꺼이 여러분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나도 예수와 부처가 인류에게 봉사했던 그 전통을 계속 따르고 있으니까요. 여러분이 의사, 기술자, 변호사가 되어 나라에 봉사하는 것처럼, 나도 내 나름대로 여러분 나라와 온 세상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서로 다른 일을 할 뿐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나 말에 대해 칭송하거나 놀랄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다른 과목을 공부하여 다른 학교를 졸업한 것뿐입니다. 여러분과는 조금 다른 일을 하는 것입니다. 단지 직업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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