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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과 수행

사랑과 관용의 수행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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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입문한 후에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한낱 꿈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 배우자, 아이들, 친지들 모두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아직도 그들과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그들에게 잘 대해 주어야 하며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만 합니다.

모든 중생이 우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이 입문을 했든 안 했든,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정도이든 외도이든, 그리고 신앙이 있든 없든지 간에 우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선과 악, 슬픔과 행복, 그 모든 것이 우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좋은 사상이든 나쁜 사상이든 많은 사상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상황에 대해 얼마간의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와 다른 중생들이 함께 이 세계와 현재의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정말 지독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아주 많은 나쁜 사상과 관념을 가졌을 것이며 많은 과오를 범했을 것입니다. 세세생생 축적되어 온 이러한 나쁜 사상과 과오가 현재의 상황으로 변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존재하고 선과 악이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과 우리가 행한 나쁜 일들을 고쳐 나가기 위해 수행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우리가 아주 많은 나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로인해 현재의 이러한 나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나쁜 면을 고쳐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친지와 나라, 세계와 우주를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모두 우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들이 좋든 나쁘든, 그들이 이처럼 된 것은 모두 우리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 둘 다와 관계가 있습니다. "나는 지금 수행을 하고 싶으니까 부모님과 배우자를 다 버려야겠어."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전과 같아야만 합니다.

만약 진정으로 출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은 다른 경우입니다. 출가란 자신의 신, 구 ,의를 시방세계 부처와 중생들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수행하기에 좀더 쉽고 빨리 진보하기 위해서 세상과의 관계를 끊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자기 자신을 시방삼세불과 중생들에게 바치고 싶기 때문에 출가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경우입니다.

출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부모님께 효도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께 잘못된 점이 있다 하더라도 도덕적인 것을 권하고 아주 부드럽고 공손한 태도로 이치를 설명해야 합니다. 만약 그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든가, 여러분을 나무라든가, 혹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우리의 사고방식이나 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불효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배우자나 형제자매들에게도 아주 달콤하고 부드럽게 말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리를 설명하고 권해야만 합니다. 한구석에 앉아서 울거나 배우자를 탓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이해하도록 시도해 보지도 않고서 어떻게 우리가 그들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그들 대부분은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을 싫어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를 더욱 더 오해하고 우리에게 더 많은 문제를 가져다주게 되는 겁니다.

사랑으로써 가족을 감화시켜라

사실 이것 또한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그들이 우리를 의심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스승을 탓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탓할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충분히 지혜롭지 못한 것을, 그리고 대화를 잘 이끌어 나가지 못한 것을, 우리의 친지들을 납득시킬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 것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더욱 더 참회해야만 합니다.

동시에 그들을 더욱 더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이 느낄 수 있도록 더 큰 사랑으로 그들을 돌봐야 합니다. 그들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그들을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 비로소 그들의 마음이 움직여 우리를 믿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아주 평화롭게 수행할 수 있고, 점차적으로 그들을 바른 길로 전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책임이며, 이것이 바로 중생들을 구제하는 방법입니다.

수행자는 수행할수록 괴팍해져서는 안 됩니다. 남편이 수행을 반대한다고 남편을 꾸짖거나, 동의하지 않는다고 남편과 싸우고 말도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사다주지 않고, 관계도 하지 않고, 멀어진다면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는 말했습니다. "모든 중생은 우리의 친척이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도 말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 그가 여러분의 친구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건 모든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사람을 사랑하고 잘 대할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좋지 않은 사람도 존중하고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고 잘 대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들을 감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감화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은 참 불쌍하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복이 많다. 스승도 있고, 좋은 교리도 있고, 좋은 법문도 있으며, 좋은 가르침도 있다. 우리는 복이 아주 많으며 지혜가 있어 수행도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아주 불쌍하다. 아마 아직 때가 되지 않았겠지. 그래서 그들의 두뇌가 꽉 막혀 있고 우리처럼 수행할 만한 지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말로 불쌍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더 많은 자비심을 가져야 하며, 더욱 더 사랑하고 존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만 합니다. 그들이 이해를 안 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이건 자비도 박애도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 사람들에게 더욱 인내하고 관대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제자들에게 때때로 이렇게 대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을 내쫓을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꾸짖거나 아주 엄격하게 대하는 것은 그가 빨리 변하고, 그의 업장이 빨리 소멸되고, 그의 에고가 깨어져 잘못을 빨리 개선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것을 잘 알며 그도 그가 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게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재미있는 성자

내가 출가하기 전, 내가 10대였을 때 사람들은 나를 생불(生佛)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때는 생불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몇몇 친지들이 나를 이런 식으로 불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웃기는 성자, '재미있는 성자'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아주 괴짜 성자, 재미있는 성자라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생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짜 나를 부처로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의 개성이나 행동거지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생불처럼 아주 좋았다는 뜻입니다. 나는 일을 할 때나 사람들을 대할 때 아주 이완되어 있었고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나를 '웃기는 성자', 혹은 '재미있는 성자'라고 불렀던 겁니다. 또 좀더 진지하게 나를 생불이라고 불렀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영국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들도 나를 생불이라고 불렀습니다. 독일 사람들도 내가 아주 웃기고 재미있는 성자, 혹은 보살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울락 친구들 또한 나를 생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 당시 나는 어떤 법문도 수행하지 않았고, 그저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경전을 읽었을 뿐 그렇게 진지하지 않았었습니다.

나는 보통 사람과 같았습니다. 겨우 10대 소녀였지요. 그때는 아직 어렸었고 출가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심지어 내가 20세가 넘었을 때도 내가 머물렀던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나를 이러한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내가 보살이나 성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농담입니다. 그러나 농담 같은 진담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느꼈으며, 나를 칭찬하는 의미로 말했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잘 대할 수 있었다면, 수행자라면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전보다 교리를 더 잘 이해해야 합니다. 나는 그때 교리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스승도 없었습니다. 나는 단지 어릴 때부터 도덕경, 불경, 성경, 기타 다른 경전들을 읽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깨달은 스승의 지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도리에 대해서 안 것은 아닙니다. 그때 나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대했습니다. 당연히 지금은 사람들에게 더 잘 대해야만 하겠지요.

엄한 꾸짖음은 깊은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때때로 내가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전에는 좀처럼 사람들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렇게 합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내 가까운 제자들을 빨리 가르쳐 그들이 빨리 진보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들을 꾸짖을 때 그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을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에 꾸짖는 겁니다.

만약 그들을 싫어한다면 아예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은 집에서 아이들을 더 많이 꾸짖지요? 이웃집에 가서 그들의 아이를 꾸짖습니까? 만약 옆집 아이들이 밖에 나가 훔치거나 살인을 해도 여러분은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혀 상관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아주 싫어할지라도 여러분은 실제로는 개의치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내어 그의 집에 찾아가서 관여하고 관심을 가지고 걱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의 집에 찾아가 이치를 설명한다거나 꾸짖거나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게 하고 때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청중 예)

일반적으로 부모들은 항상 그들의 자녀들이 그들보다 낫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농부라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식이 의원이나 대통령, 혹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나 박사, 변호사 등. 이런 사람이 되기를 꿈꿀 것입니다. 많은 부모들이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고 부유하지도 높은 지위에 있지도 않지만, 그들은 아주 열심히 일하면서 온갖 노력을 기울여 자식을 교육시킵니다. 좋은 교육을 받아 높은 지위를 얻고 좀더 안락한 삶을 살게 해 주려고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이지요.

모든 부모들이 자기의 자녀들은 더욱 더 편안하고 고상하며 부유하고 뜻 깊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 혹은 제자들을 꾸짖거나 아주 엄하게 대하는 것은 그들이 나보다 더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충분히 겸손하지 못하다면 나의 제자들이 더욱 더 겸손하고 나보다 교만하지 않기를 바랄 겁니다. 혹은 내가 충분히 지혜롭지 못하다면 내 제자가 나보다 더욱 더 지혜롭고 현명하기를 바랄 겁니다. 나의 등급이 충분히 높지 못하다면 여러분의 등급이 나보다 더욱 더 높고 훌륭하기를 바랄 겁니다. 나의 힘이 충분치 못하다면 내 제자들은 나보다도 더욱 더 큰 힘을 갖기를 바랄 겁니다.

내 등급이 단지 초지보살 단계라고 가정해 보세요. 초지보살이란 막 발심한 상태여서 아직은 성인이라 할 수 없는 단계를 말합니다. 성인이 된기 위해 배우기로 막 결심한 단계지요. 그렇더라도 나는 내 제자들이 빨리 십지보살이나 최고 높은 성인이 되기를 바랬을 것입니다. 그것은 내 제자들이 나보다 더 훌륭하고 강해져서 수행에 있어서나 다른 모든 면에서 나보다 더 낫고 더 빨리 진보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제자들에게 아주 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 대부분은 나의 성격을 이해하고 나의 가르침을 이해하며 나의 초월적인 사랑이 인간의 감정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엄하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겸손과 온화함은 사람들과 교통하는 최상의 방법이다

우리 친지들이 도덕과 우리의 사고방식과 우리의 등급, 수행법문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더욱 더 관대해야만 합니다. 그들을 꾸짖어서도 안 되며 때리거나 억지로 우리를 믿으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좀더 현명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홍법을 할 때 우리가 그들을 교육시키고 있다고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주 평상적이고 부드럽게 말하십시오. 마치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 가벼운 대화를 나누듯이 말입니다.

그들을 스승의 제자로 만들려고 한다고 느끼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두려워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들은 내 말을 들어야 해요. 내 스승님의 힘을 느끼나요? 당신은 이해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지옥에 갈 거에요. 당신이 내 스승을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가장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정말 멍청이에요. 내 스승이 정말 무상사라는 것을 당신은 몰라요. 우리의 법문이 최고의 법문이라는 것을 모르나요? 정말 너무 불쌍하고 어리석고 지혜가 없군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수행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은 자존심도 강하고 에고도 높고 집착도 강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사상이 최고이고, 그들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고, 그들의 종교가 제일이고, 그들의 관념이 가장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만약에 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면 그때는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교육시키려고 한다거나, 그들을 우리의 동수로 만들려고 한다거나, 그들을 불자로 만들려고 한다고 그들이 생각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들과 종교문제에 관해서는 말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믿는 종교를 그대로 믿도록 하십시오. 그들이 도교를 믿는다면 좋은 도교 신도가 되도록 하고 도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시오. 난 이미 이것에 대해 말했습니다.

나는 《도덕경》에 관해서도 약간 언급했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십시오. "《도덕경》은 아주 좋은 경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이해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당신'이 이해 못한다고 말하지 말고 '우리'가 이해 못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 도울 수 있고, 대화를 나누면 서로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자신의 이해의 등급을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고 자신이 이해한 사상이나 견해를 표현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들의 견해를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의 생각은 아주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내게도 한 가지 생각이 있어요. 그러니 이치에 맞는지 인내를 갖고 한번 들어봐 주세요." 바로 반박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견해가 틀렸어요. 당신은 너무 어리석군요. 그런 게 아니에요"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우선 그의 생각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도 생각의 자유와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이해하고 생각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들과 교통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봐야만 합니다. 그때 서로 이해할 수 있고 교통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람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처럼 관대하라

수행을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관대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이해의 수준을 더욱 더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의 자유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는 아주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창조주는 아주 많은 것들을 창조해 냈습니다. 큰 나무, 작은 풀, 코끼리, 바퀴벌레, 개구리, 그 밖의 많은 것들을 포함해서요. 창조주는 이 모든 것들을 다 포용할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의 친지와 친구와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생각을 포용할 수 없을까요? 우리는 창조주처럼 관대해야 합니다. 창조주는 우주 만물을 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우주 만물을 포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될 수 있고, 최고의 경지, 최고의 등급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 등급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가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배움을 통해서 언젠가는 최고이고, 가장 관대하고, 가장 자비롭고, 가장 인내심이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수행자입니다.

수행자들은 수행할수록 더욱 괴팍해져서도 안 되며 다른 사람들과 멀어져서도 안 됩니다. 내적인 면에 관해서는 소위 관계가 없지만 외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똑같아야 합니다. "나는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중생들을 구제하겠다."고 서원을 했는데 한두 사람조차 구할 수 없다면 이를 어떻게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수행 목적은 더욱 사랑이 넘치고 인내심이 있고 고상해지는 것입니다. 가부좌를 하거나 관음법문을 수행하는 것만이 수행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것도 수행입니다. 그러나 외적인 면에서 행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하나의 수행법문입니다. '관용' 역시 하나의 수행법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도록 하는 것도 우리의 수행법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자신을 삼계 이내에 묶어두고 자유로울 수 없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주의 자연스런 존재의 체계에 개입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퀴벌레를 코끼리로 변화시키려고 하고 지렁이를 나비가 되도록 강요합니다. 이것은 우스운 일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노자는 '천하본무사(天下本無事)'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본래 어떤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되어져야 할 일도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우리와 함께 수행을 하고 싶고 우리와 같은 이상을 가졌다면 그때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를 전향시키려고 안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 있는 성자가 되는 것

중생들을 억지로 수행하게 할 수 있었다면 왜 수십억 년이 지난 지금 모두 부처가 되지 않았을까요?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조급해 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를 미워할 수 있고 우리가 그들에게 미움을 받을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 없습니다.

자비와 박애는 우리의 수행법문입니다. 우리의 품성이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게 하십시오.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하십시오. 우리가 살아 있는 부처이며 재미있는 성자라고 느끼게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살아 있는 보살과 같다고 느끼게 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이 이를 성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아주 빨리 그것을 성취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한 나에게 협조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닫아두고 내가 들어갈 수 없도록 한다면 나는 여러분을 가르칠 수 없고 교통할 수도 없습니다. 나는 단지 여러분이 잠잘 때만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의 두뇌가 더욱 더 이완되니까요. 너무 피곤해서 저항할 수가 없는 거지요. 이 육신 또한 너무 피곤해서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 내가 여러분을 가르치기가 훨씬 쉬운 겁니다.

많은 제자들이 좀처럼 명상을 않더라도 그들이 잘 때 종종 스승이 와서 뭔가를 이야기해 주고 그들의 문제에 답을 해주거나 도와주는 꿈을 꿉니다. 왜냐하면 그때 두뇌가 좀더 이완되기 때문입니다. 입문자 여러분에겐 잠자는 것 또한 보통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꿈 역시 내면의 체험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발설해서는 안 됩니다.

굳이 말을 해야겠다면 나에게 하십시오. 혹은 수행일기에 적으세요. 진짜 그 일이 발생했을 때 꿈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겁니다. 그때 여러분은 꿈이 체험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이것은 스승이 여러분에게 먼저 와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혹은 여러분을 '야간학교'에 데려가 수행하고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자비의 법률

인과법보다 더 높은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비의 법이고 관용의 법으로 신에게서 직접 나옵니다. 인과법은 낮은 것으로 신이 이 우주를 다스리려고 임명한 부하입니다. 그러나 이것 위에 더 높은 법이 있는데 사랑과 관용, 자비의 법이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왔을 때 이 땅에 가져온 것이고, 부처가 육신이 있을 때 우리에게 준 것이며, 모든 깨달은 스승이 사람들에게 구원과 도움을 주려고 가져온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법칙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에게 가면 어떤 업도 당신에게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업의 법칙 위로 끌어올려 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왕을 알고 있으면 장관들이나 경호원들을 무서워하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은 왕의 친구이고 왕의 보호를 받습니다. 신분이 다릅니다.

칭하이 무상사/ 1987. 7. 5. 포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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