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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할 때 얻은 바가 없이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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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고요하게 한참을 여기 앉아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평정의 힘을 경험했습니다. 부처나 신의 힘은 전기쇼크처럼 여러분을 흔들어 대지 않습니다. "우와, 오는구나! 축복이 오고 있어!" (스승님이 전기쇼크 장면을 흉내내시다.)(대중 웃음)

부처나 신의 힘은 아주 고요합니다. 그건 우리 자신의 힘이어서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너무도 편안하고 자연스럽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인식합니까? 물론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죠!

우린 낯선 존재가 있을 때에만 뭔가 다른 분위기를 느낍니다. 그래서 자기가 명상을 하면서 뭔가 이로움을 얻는다는 걸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아무 이익이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러워서 매우 주의 깊게 집중해서 봐야만 자신이 얻은 걸 알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한 대로 '얻은 바가 없는'것입니다. 그렇지만 공자의 책에서는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은 이 둘이 같은 말입니다. 거기엔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반야심경'과 '대학'은 각기 다른 표현일 뿐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를 얻는다'고 해도 맞고 '아무 것도 얻지 않는다'고 해도 맞습니다.

여기서 '얻어지는 것'은 셈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므로 '얻는 것'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전기쇼크를 받는 것처럼 감각적으로 느끼거나 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그렇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의 업장이 너무 무겁거나 우리의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신의 축복이 내려와 우리의 부정적인 기운을 날려버릴 때 충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낯선 현상이어서 충격적으로 느껴질 겁니다.

마야는 외적인 영(靈)이나 기운을 말하므로 신의 힘과 마야는 서로 상충됩니다. 우리 안에서 두 힘이 서로 상충되므로 우리 자신은 그것을 낯설게 느낍니다. 마치 우리 안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처럼 우린 충격을 받을 겁니다.

반면에 우리 업장이 그다지 무겁지 않고 우리가 외적인 영(靈)이나 기운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면 우린 아주 편안하여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완전히 평온하여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 내면의 빛을 보고 내면의 소리를 들음으로써 그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때로 우린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뭔가 흥분되는 일이 벌어지길 기대합니다. 한 예로 입문 때 천둥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하면 여러분은 계속 천둥소리가 나기만을 기대합니다. "어째서 아직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는거지?"

하지만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여러분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내면의 천둥소리는 외적인 천둥소리만큼 그렇게 충격적이지도 않습니다. 내면에서 우르릉거리는 큰 소리가 들려 마치 천둥소리를 듣는 것 같다는 것이지 사실 이 둘이 같은 소리는 아닙니다. 내면의 소리는 세속의 소리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가 천둥소리를 언급했는데, 이게 바로 그 소린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집중이 흐트러지고 천둥소리마저 사라져 버립니다!(스승님과 모두 웃음)

조금 전 한 동료수행자가 말하길, 그는 '옴'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건 내면의 소리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분명 내면의 소리죠! 때론 여러분의 기대가 지나칩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오늘은 첫날입니다. 앞으로 놀라운 일들이 더 많을 겁니다. 여러분이 수행을 열심히 하며 자신의 에너지를 비축해 둘 때 믿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보문품'에서 언급한대로 '불길에도 타지 않고 칼날에도 죽지 않는'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이 문구를 외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길에 금세 타버리고 칼날에 곧 죽어버리죠. 여러분은 결코 이런 체험을 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건 상징적인 현상입니다.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죠. 그건 고대인들이 자신의 체험을 글로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외웁니다.

'관음보살 보문품'에 "불길에도 타지 않고 칼날에도 죽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나오는 것을 보고 그걸 열심히 외우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체험이 아닌데 왜 그걸 계속 암송하는 걸까요? 어쨌든 소용없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체험일 뿐이니까요.

한 예로 어떤 사람이 과자를 먹고 있다고 합시다. 그는 과자가 정말 바싹바싹하고 맛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계속 되풀이한다면 정말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그는 과자를 먹었기에 과자의 맛이 어떠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자신이 느낀 맛을 글로 적어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과자를 먹지 않았으니 그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맛을 표현하겠습니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체험한 것을 외우는 게 소용 있을까요? 그러므로 암송하는 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하지만 이젠 '보문품'을 외우는 것도 이로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보문품'에는 우선 관음보살을 친견하는 것이나 다른 놀라운 비전을 보는 것에 대한 묘사와 관음보살의 공덕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런 다음 계속해서 범음이나 해조음 등 초세계적인 신비한 소리들에 대한 언급이 나오죠.

여기서 앞부분은 관광(觀光)을 묘사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관음(觀音)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바로 내면의 체험을 명쾌하고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뭘 의미하는 지도 모른 채 그것을 외우고 있습니다. 나의 화신을 봤다고 방금 말한 사저를 예로 들어봅시다. 그 사저는 어젯밤 꿈에서 나를 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일찍 이곳에 오고 싶어했죠. 그리고 방금 전 입문하는 동안에 또 다시 나의 빛나는 화신을 봤습니다. 내면의 화신은 외면의 스승과 매우 흡사하지만 외면의 스승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옷도 더 예쁩니다.(박수)

내가 여기 오기 전에 그 사저는 내 화신을 보고 나를 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입고 있는 옷이 달랐죠. 그녀가 본 모습은 빨간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강연 중에 나는 노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나는 빨간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저는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이 옷이 바로 그 사저가 봤던 옷입니다. 나는 다양한 색상의 옷을 입습니다. 어떤 것은 아주 쇼킹하죠. 사람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이따금 사람들은 내면으로 각기 다른 내 모습을 봅니다. 옷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난 사람들이 나를 알아볼 수 있게 그런 옷들을 입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내면으로 나를 만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들이 본 그 옷을 입고 있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알아보지 못해 나와 연결되지 못합니다. 전생에 나와 맺었던 인연을 잊은 것이죠. 그러다 내가 그 옷을 입은 걸 보면 무의식중에 나를 기억하고는 서둘러 수행을 하게 됩니다.

이런 예들은 많이 있지만, 하나로 충분할 겁니다. 그런 얘기들은 듣고 있을 시간이 없죠. 빛을 보지 않더라고 우린 편안하고 고요하게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삼매에 든 것 처럼요. 그리고 아주 좋은 체험도 합니다.

날마다 우리의 사랑과 지성과 지혜가 자라나고 생활이 점차 안정됩니다. 우리는 아주 안전하고 안정된 느낌, 어떤 힘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 또한 체험이며 수행의 이로움입니다.

빛을 보려고 수행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빛은 단지 우리가 수행의 노상에 있고 제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마음을 놓을 수 있으니까요. 만일 빛을 보진 못해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린 자신이 안전하고 갈 곳이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것도 좋은 체험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내적인 체험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동수들한테도 말해선 안 됩니다.

칭하이 무상사 / 1992. 2. 20. 홍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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